마이다스동아일보[도서/출판:신간소개]

적멸

박 일문의 장편 구도소설. 등단작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80년대 세대의 삶을 밀도있게 그려냈던 작가가,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구도소설'을 불쑥 던져 놓았다.
첫 장편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그가 꺼낸 헌사는 '우리시대의 5.18세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였다. 그럼 누가 헌사를 바치는가? 그 주체는 '현실없는 젊음의, 치열한 현실'을 살 아가는 80년대 세대이다. 작가는 일관되게 80년대 세대의 방황과 좌절속에서 문학적 대안, 혹은 구원을 찾아왔다.
'적멸'은 이러한 일관된 주제가 불교라는, 삶이기도 하고 또한 종교이기도 한, 구원의 방편 을 통해 드러난다. 그가 그리는 화엄은 선정삼매의 경지에 빠지는 존재가 아니다. 우아하고 화려한 화엄을 날렵한 필체로 써내려가는 건 그답지 않다.
'적멸'은 거칠고 거친 불교계의 현실을 적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현실의 모습, 방황하는 젊은 이들, 운수행각하는 구도자들을 통해, 작가는 또다시 세계와 자신과의 밀고 당기기를 시도하 는 것이다. '적멸'은 자기기만, 자기최면에 빠져버린 무기력한 불자들이 아닌, 고민하고 방황 하는 인간으로서의 한 존재를 다룬다.
이 소설의 일차공간은 영주부석사와 무량수전.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조부마저 죽자 출 가, 부석사로 들어온 운수(雲水)가 무애(無涯), 적묵(寂墨), 학능(學能)이라는 구도의 동반자 들과 부딪히며 겪는 고뇌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인물의 성격 혹은 존재론적 표상과 직결된다.
작가 박일문은 열일곱의 나이에 출가한 이후 15년간 출가와 환속을 되풀이하는 반승반속의 생활을 해왔다. 이런 작가의 승력이 이 작품의 창작동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자신의 승력 을 이 작품에 투영시킴으로써, 작가는 '극단적으로 방황하는 20대의 행적'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운동권 사람들의 상처와 반성의 기록'인 '아직 사항할 시간은 남았다'와는 또다른 문 제작을 선보인 것이다.
작가 박일문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여 영남대 법대를 졸업했다. 199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에 '왕비를 아십니까'로 당선되었고, 같은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제16회 '오늘의 작가 상'을 수상하였다. 연락처 765-4330.

■글: 박일문 ■펴낸곳: 민음사 ■ 가격: 7,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