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주간동아 205호]

■집중 점검 "변화구서 직구로" 강공 승부수 "재벌개혁 본궤도"지평... 총선 등 의식 중산-서민층 끌어안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매운 고추장에 또 매운 고추를 찍어 먹는 사람들이다. 투수가 던지는 공의 구질(球質)에
비유한다면 불같은 강속구를 좋아하지, 밋밋한 변화구에는 관심이 없다.”

여권 관계자들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보광그룹과 한진그룹의 탈세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의 아들 재용씨에 대한 변칙증여 및 탈세의혹 조사 등 잇따른 대 재벌 강경조처 이후 여론의 분위기가 호전되고 있다는 각종 보고가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의 한 핵심 당직자는 “재벌개혁 작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김대중대통령과 여권에 대한 지지도가 상승 곡선을 타고 있다”면서 “뭔가 와장창 깨지거나, 귀하신 몸에서 졸지에 수갑을 차는 등 ‘화끈한 일’이 벌어져야 좋아하는 일반 정서를 외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최근 김대통령과 여권의 ‘개혁 강공’은 변화구에서 강속구로 구질을 바꾼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개혁만이 살 길 … 더 밀리면 끝”

당 정세분석실의 한 고위관계자도 “여러 채널을 통해 올라오는 보고에 따르면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 속 시원하다’ ‘이제서야 정권교체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등등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면서 “그동안 여권의 정국 운용 스타일이 뭐 하나 되는 일 없이 뜨뜻미지근하게 비쳤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중앙일보 홍석현사장의 구속도 보광 탈세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부터 이미 예정돼 있었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 뚜껑을 열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연 다음에야 수많은 일반인들과의 법적 형평성 문제 때문에 구속 이외의 다른 수순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권의 최근 ‘강공 드라이브’는 내년 총선을 위한 일시적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또다른 관계자는 “총선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심 변수는 아니다. 김대통령은 지난 8·15경축사 등을 통해 재벌개혁을 자신의 임기 중 최대 과업으로 삼겠다는 뜻을 이미 명확하게 밝혔지 않은가”고 말한다. 다시 말해 최근의 대 재벌 강력 조처는 김대통령이 그동안 여러 차례 강조했던 재벌개혁이나 조세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일이지,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직을 맡고 있는 수도권의 한 의원도 “최근의 개혁 강공은 ‘개혁만이 우리의 살 길이고, 여기서 더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서 “이런 절박함에 단순한 정치적 이해득실만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21세기에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터전을 20세기내로 끝내야 하기 때문에 개혁의 가속도가 붙고 있는 것이지, 총선을 겨냥해 일시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영합하기 위한 정책 기조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에도 불구하고 총선과 관련한 여권 내부의 엄밀한 계산이 없을 리 없다. 모든 정치 행동이 그렇듯 명분확보 뒤에는 그것이 실행에 옮겨졌을 때의 정치적 득실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전제가 된다. 현 정권 대표적 이데올로그의 한사람으로 부지런히 정책 제안을 하는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중산`-`서민층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정권 무너진다” “그동안 DJ가 치러왔던 선거는 좀 단순화하자면 일하면서 소득을 얻는 사람 대 일하지 않고도 소득을 얻는 사람(혹은 일하지 않는 사람)의 대결 구도였다고 할 수 있다. 투표 참여자의 성향을 분석했을 때 DJ는 어느 선거에서나 부유층 보수층 여대생계층에서 항상 8% 정도 뒤졌다. 그러나 중산층과 서민층, 근로 여성층에서는 지속적으로 4, 5%를 이겼다. 지난 대선은 이런 대결 구도에서 이긴 첫번째 선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번 총선의 의미도 역시 명확하다. 중산층과 서민층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아마 이 정권은 무너질 것이다.”

이 교수의 이같은 분석이 여권 고위층의 정책 집행이나 정국 운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민회의의 한 부총재는 최근의 여러 강공책이 “대통령을 에워싸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반영된 듯하다”면서 “ 생산적 복지론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학자들이란 이진순 KDI원장,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 황태연 동국대교수, 김유배 청와대복지노동수석 등을 일컫는 것. 이들은 김대통령이 집권 1년을 맞아 지난 3월 천명한 ‘생산적 복지론’의 이론 제공자들이다. 따라서 지금에 이르러 생산적 복지론은 김대통령의 통치철학 및 정국 기조이자, 선거 전략의 근간이기도 한 다중성을 지니게 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교수 역시 “생산적 복지론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국가 전략일 뿐 아니라 구체적인 전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위의 여러 정황들을 종합할 때 DJ정부는 ‘중산층과 서민층의 지지도 없어지면 끝’이라는 절박감에서 여러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김대통령에게 상시적으로 비우호적이었던 부유층과 보수층을 우호적으로 돌리는 일은 이제 포기한다는 정책으로도 보인다. 그동안 그들을 끌어안으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총선이라는 선택의 순간을 앞두고 김대통령도 어느 한 길을 강요받았던 셈이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