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주간동아 205호]

■정치.한반도 "답답해요 DJ, 서운해요 JP" 권력서 밀리고 TK선 욕먹고... "곧 중대결단할 것"

자민련 박태준총재(TJ)가 흔들린다. 위기의 본질은 파워의 상실이다. 그가 갖는 힘의 근원은 두가지다. 하나는 지역구인 포항을 중심으로 한 대구-경북이라는 지역기반. 두 번째는 권력주체로서의 위상이다. 그가 DJT 공동정권의 한 축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박총재는 지금 이 두가지 모두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특히 두 여당간의 합당론이 불거지면서 소외 현상은 점점 더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박총재의 한 측근은 이렇게 전한다. “정권 출범 초기부터 박총재는 지역구보다는 국정 전반에, 자민련의 실익보다는 공동여당간의 이해 조정에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박총재는 대구-경북지역에서도 호의적인 여론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공동정권의 중심축에서도 밀려나는 형상이다.”

박총재의 처신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끊임없이 여권 중심으로 회오리쳐 들어오는 합당론이다. 그 화두는 김종필총리가 제공하고 있다. 김총리의 최근 발언 속에서 이는 명확히 드러난다. 김총리는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합당 얘기를 하는 사람은 당을 떠나라”(4월1일) “자민련은 자민련의 길을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9월5일) 등의 발언을 통해 합당 반대에 가까운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다가 지난 9월16일 국민회의 내 개혁그룹 의원들과의 만찬에서 “국가와 국민의 차원에서 판단하겠다”고 운을 뗀 뒤부터 점차 합당 쪽으로 기울어지는 분위기다. 계속해 김총리는 “올해 안에 독자적으로 갈지, 새로운 당을 만들어 내일을 열어 가는데 가담할지에 대한 당론을 모을 것”(9월30일)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합당땐 위상 애매 … “합당 NO”

분명한 건 김총리가 합당을 ‘미래의 희망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합당 불가에서 출발한 김총리의 여정은 지금 합당 수용까지의 절반쯤에 와 있다. 김총리는 이미 합당의 손익계산을 뽑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김총리의 합당 발언은 김대중대통령(DJ)과의 교감 아래서 이뤄지고 있다는 게 정치권 일반의 시각이다.

합당론이 횡행하는 것은 박총재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때 박총재가 자민련 내 대표적인 합당론자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박총재의 의중을 다소라도 읽을 줄 아는 이들은 박총재를 ‘합당론을 이해하는 반대론자’ 정도로 파악했지만, 충청권 출신들은 그를 합당론자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김대통령과 친하게 지냈다는 점도 이같은 오해 만들기에 일조를 했다.

그런 그가 합당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지난 10월9일 “합당을 안한다는 우리 당의 입장엔 변한 것이 없으며 선거제도는 반드시 중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거대여당을 만들어 힘을 키워서 어쩌자는 건가. (합당 시에는)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박총재가 합당을 반대하는 이유는 첫째 지역 여론에서의 반여(反與)-반DJ 정서, 둘째 전국정당화를 위해서는 중선거구제 도입이 합당에 우선한다는 신념, 셋째 합당 이후 애매해질 여권내 입지 문제 등이다. 하지만 이같은 박총재의 의중과는 달리 합당은 가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에 따라 김대통령과 김총리의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두 사람과 박총재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분위기다. 박총재 주변에서는 “도대체 1년반 동안 주례회동을 해서 남은 게 뭐가 있느냐”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더 이상 김대통령과 박총재 사이에 밀월은 없다”는 얘기도 나돈다.

김대통령과 김총리의 밀착을 바라보는 박총재 마음은 심란할 수밖에 없다. 그의 측근들은 “중선거구제 도입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별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 김대통령에게는 답답함을, 합당 문제를 당론에 맡기겠다면서도 연일 합당 여운을 진하게 풍기는 김총리에게는 서운함을 갖고 있다”고 박총재의 심경을 전했다.

“총선 뒤 총리” 관측도

합당이 이뤄질 경우 여권의 권력지도에는 상당한 변화가 생길 게 분명하다. 합당이 가시화한다면 그 시점은 올해 말에서 내년 1월 사이가 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분석. 이는 김총리의 당 복귀 시점과 일치한다. 문제는 합당후 박총재의 위상이 애매해진다는 점이다. 합당에 따른 그의 거취는 신당총재와 총리 두가지 중 하나로 모아진다. 그러나 힘의 역학관계로 볼 때 박총재가 ‘신당 총재’로 추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박총재가 총리로 나서는 게 유일 대안이나 이 역시 간단치 않다. 선거법상 현역 총리로서 총선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박총재가 김총리의 당 복귀 시점인 내년 1월쯤 총리직에 오른다면 의원직은 지역구든 전국구든 포기해야 한다. 총리 취임 뒤에도 아무도 후사(後事)를 보장할 수 없다. 총선 후 더욱 치열해질 야당의 정치공세나 대형 사건사고후 으레 잇따르는 총리 책임론 등에 초연해질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구 의원 당선후 총리 취임’이라는 절충안이 제시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박총재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합당으로 여차하면 그가 여권내 여러 중진 중 한명으로서 전락할 위험성도 다분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TK신당과 관련한 여러 소문과 억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자민련내 일부 영남권 의원들은 박총재를 중심으로 TK신당을 창당해야 한다며 이를 박총재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박총재가 현 여권과 결별하는 길을 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대구 출신의 한 원로의원은 박총재 거취와 관련해 “지역감정의 철폐, 근대화추진세력과 민주화세력간의 화해를 명분으로 DJT 공동정권을 열었던 그가 ‘화해와 치유’의 정신을 스스로 버리는 행보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면 박총재의 최종적인 결단은 무엇일까. 그는 그간 두 번의 역사적 선택을 경험했다. 한 번은 지난 92년 대선 직전 여권 대통령후보였던 김영삼씨와의 결별이며, 다른 한 번은 97년 대선 직전 DJP 연합에의 참여다. 첫 번째 것이 과거의 결단이었다면 두 번째 것은 현재를 규정하고 있다. 정치인 TJ는 이제 세 번째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 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자신의 미래를 규정할 결단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다. 박총재를 잘 아는 이들은 “박총재는 결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결심하면 무섭게 밀어붙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허 민/ 문화일보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