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주간동아 205호]

■경제 땜질 처방에 골병드는 경제 '발등의 불'끄기 급급 길게 못봐... "11월 대란설 시기만 늦춘 셈"

정부가 2차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한 직후 주가는 큰 폭으로 출렁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융 당국이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이 대책이 발표된 다음날 주가 800선이 무너지며 금융 당국의 기대를 배신했던 주식 시장이 이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식 시장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전혀 아니다. 정부가 일정을 앞당겨 내놓은 금융시장 안정 대책의 대부분이 단기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투신사 구조조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채권 시가평가제를 전면 유보하기로 한 것은 정부 대책의 일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시가평가제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1년 전인 98년 11월이었지만 제대로 시가 평가를 받게 되는 펀드는 하나도 없는 셈이 돼버렸다. 애초 정부 방침은 신규 펀드는 시가평가제 도입 이후 곧바로 평가에 들어가고 기존 펀드는 내년 7월부터 시가 평가한다는 것이었지만 현재 투신사들 대부분이 기존 펀드에 신규펀드를 편입하는 ‘물타기’ 방식으로 펀드를 운용해 왔기 때문에 시가 평가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앞으로도 투자자들이 투신사의 채권형 수익증권을 실적 배당 상품이 아니라 ‘고수익 은행 예금’ 정도로 인식하는 난센스는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채권 시가평가제 전면 유보로 ‘후퇴’

그러나 문제는 있다. 채권 시가평가제는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합의사항이다. 따라서 이를 유보하려면 IMF와도 협의를 거쳐야 할 형편이다.

채권 시가평가제를 유보한 것은 채권 유통시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가에 의한 채권 가격 평가가 불가능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 경제 전문가들은 진작 채권 시가평가제가 실시됐더라면 대우사태가 이처럼 금융 전반의 위기로 번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근본적 해결을 미루다 보니 문제가 점점 커지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또 한번의 미봉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또 하나의 덫은 물가 인상에 대한 우려와 이로 인한 금리상승 가능성이다. 이미 경기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국제 유가가 치솟는 등 물가상승 압력은 도처에 널려 있다. 게다가 올해 치솟고 있는 유가의 영향은 기업들에 내년도 비용 상승 요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 내년에는 총선이라는 경제 외적 변수까지 기다리고 있다. 총선 변수가 인플레 심리에 기름을 붓게 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전철환 한국은행총재도 IMF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물가상승 압력을 강조하는 발언을 해 한은이 통화 긴축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물론 전총재의 발언이 보도된 다음날 주식시장은 폭락 장세를 면치 못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지난 10월7일 열린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서는 원칙론보다 현실론을 택했다. 물가상승 압력이 있는데도 콜 금리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 이같은 방침은 대우사태로 인한 금융시장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론에 휘말려 금리 조절의 시기를 놓치게 되면 내년에는 총선이 예정돼 있어 더욱 힘들어진다는 ‘또 하나의’ 현실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리가 오르게 되면 채권시장 안정기금에 출연한 은행들이 손실을 입게 되고 기금 운용은 더욱 어려워진다. 금융 당국이 ‘8%대 금리’를 여러 차례 강조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금리 안정책은 단기적 효과를 내는 데 그칠 것으로 보는 우려 섞인 시각도 있다.

채권시장 안정기금의 규모도 문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대우사태가 발생한 7월19일 이후 추석 전까지 투신사 수신 금액 중 빠져나간 돈은 무려 39조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한때 250조원까지 늘어났던 투신사의 수신 금액에서 두달 사이에 15% 정도가 빠져나간 것이다. 이 금액은 정부가 금융기관을 통해 조성하기로 한 채권시장 안정기금의 두 배 가까운 금액이다. 결국 채권시장 안정기금이 바닥나게 되면 한국은행이 개입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박철 한국은행부총재보도 “중앙은행이 최종 대부자로서 투신사들이 보유한 국공채를 매입해서라도 금융시장 불안 상황을 해소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국은행마저도 채권시장 안정기금만으로는 금융시장을 진정시키기 어렵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총선 변수 … 인플레 심리에 기름 부을 수도

금융당국으로서는 생각하지 싫겠지만 채권시장 안정기금과 관련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역시 지난 96년 폐지된 증권시장 안정기금의 재판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89년 4월 1000포인트를 기세좋게 돌파했던 주가가 90년 들어 700포인트대로 떨어지자 당시 정부는 600여개나 되는 거의 모든 상장사들의 출연으로 기금을 조성해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증안기금은 총선을 앞두고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각 증권사들에 매수 자금을 쏟아붓는 등 시장을 왜곡시켰다는 평가를 남긴 채 해체돼 버렸다. 증안기금이 해체된 데에는 문민정부 시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자 시장경제원리와 전혀 맞지 않는 이 기금을 없애버리라는 국제 사회의 요구가 거센 탓도 있었다.

증안기금은 수익을 내기 위해 주식시장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 집행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주식시장에 돈을 쓸어넣은 것이다. ‘정책적’ 판단이 ‘경제적’ 사고를 대체해 버린 것이다.

물론 당시와 지금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비슷한 것이 있다면 ‘자발적임’을 강조한 할당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4조5000억원대의 기금을 600여개 상장사가 분담한 증안기금의 5배나 되는 20조원을 출연해야 할 은행들 사이에서는 이미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은행들은 연말까지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BIS) 8%를 맞춰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다. 그래서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어차피 부실의 규모가 드러날 만큼 드러난 바에야 투신권의 구조조정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 문제를 미뤄놓기만 해서는 외국인을 비롯한 투자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서강대 조윤제교수(경제학)는 이와 관련해 외환 상황을 걱정하기도 했다. 조교수는 “정부가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이 폐쇄 경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외국 같으면 자본 유출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고 경고했다.

금융 당국의 대책이 시장의 장기적 신뢰를 잃으면 투자자들은 언제든지 보따리를 쌀 준비가 돼있는 사람들이다. 정부가 대우 채권의 80%를 환매 보장해주는 11월 대란설을 의식해 근본적 수술을 도외시한 채 단기 처방에만 급급한다면 결국 95%를 환매해주는 내년 2월이 오면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다. 정부가 11월 대란설을 2월 대란설로 시기만 늦춰 놓은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