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주간동아 205호]

■문화 프로기사의 결혼 약인가 독인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9단이 상투를 틀었다. ‘한노협’(한국기원 노총각협회)의 간사격이었던 유9단이 마침내 서른네살의 노총각 딱지를 떼고 10월9일 63빌딩에서 MBC아나운서 김태희씨(28) 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유9단의 탈(脫) 노총각기(記)는 그의 바둑스타일 그대로 2년여에 걸친 집요한 공략 끝에 거둔 불계승(?)이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프로기사에게 결혼은 성적에 플러스가 될까, 마이너스일까. 대다수 기혼 기사들의 의견은 가정이 주는 안정감은 승부에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는 쪽이다. 조혼(早婚)한 모 기사는 이렇게까지 익살을 부린다. “일단 인간의 오욕 가운데 하나(성욕)가 해결된 것만으로도 무쇠도 씹어먹을 나이의 젊은 기사들에겐 엄청난 플러스다. 더이상 곁눈질로 정신을 분산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창호 9단의 최대 라이벌이자 세계대회에서도 여러번 우승한 유창혁 9단은 ‘일지매’란 별칭을 가질 만큼 호리호리한 미남형이어서 바둑을 모르는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노총각 생활이 너무 길어서인지 그의 바둑은 기복이 심했다. 잘 나갈 땐 벤츠 저리 가라인데 그 반대의 경우엔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무색케 했다. 이 점을 감안한 최규병 9단은 일찍이 이런 예상을 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최9단 역시 서른여섯살에 총각딱지를 뗀 ‘한노협’의 좌장쯤 되는 기사였다.

“낼모레면 나이 쉰을 맞는 조훈현이나 서봉수 9단은 이제 지는 해다. 그렇다면 이창호 목에 방울을 달 기사는 그 이후 세대에서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 눈에 차는 재목이 안보인다. 당분간 등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 유창혁 9단은 이창호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나는 총각시절의 유창혁보다도 결혼 후의 유창혁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가 어떤 여자를 만나 어떻게 가정을 꾸리는지에 따라서 그의 잠재력은 활화산 같은 폭발력으로 다가올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창호 9단이 가장 경계해야 할 요주의 인물은 ‘유부남 유창혁’이다.”

이창호 9단은 세계 바둑계의 삼손이다. 그의 괴력 앞에 당해낼 기사가 없는 형편이다. 나이 스물다섯 총각기사가 이토록 성적을 내다 보니 이창호 9단에게 ‘여자나 결혼’은 희망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드센 편이다. 데릴라 같은 여자를 만날 것인지, 아니면 신데렐라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할 것인지에 따라 이창호의 독주여부가 달라질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다. 물론 이9단이 워낙 출중한 기력을 보이다 보니 나온 우스갯소리이기도 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96년 10월, 동아일보가 주최한 세계바둑최강전 이창호 대 다케미야(武宮正樹) 9단의 대국이 열리던 롯데호텔에 부산의 모 여대생이 이창호를 만나러 왔다며 대국장을 당당히 들어서다 진행요원들의 제지를 받고 옥신각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창호의 펜팔친구라고 밝힌 이 여대생은 우연히 롯데호텔에 왔다가 이9단이 대국 중인 것을 알게 됐고, 이 참에 한번 만나고 갈 생각인데 뭐가 잘못이냐고 따져묻다가 “…그렇다면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물러섰다. 진짜 펜팔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혼 가시권에 든 이창호의 인기가 드러난 한 장면이었다.

이창호는 여자의 ‘여’자도 모른다?

시기가 좀 이른 감은 있으나, 바둑계에서는 이창호 9단의 결혼에 굉장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떤 여자를 만날 것인지도 궁금사항이지만, 과연 그가 결혼하고 나서도 지금과 같은 페이스를 유지할 것인지에 더 흥미를 보인다. 대부분의 바둑전문가들은 세계 넘버원인 이9단의 향후 최대복병은 ‘결혼’이 될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지금까지 이9단은 자나깨나 오로지 바둑만을 생각하고 매진해 왔다. 아직까지 여자의 ‘여’자도 모른다. 허구한날 바둑만 파고 앉아 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필시 연애결혼보다는 중매결혼을 할 가능성이 많은데, 성서의 삼손이 데릴라의 치마폭에 푹 빠져 괴력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렸듯 미래의 이9단이 어떤 여자를 만날 것인지는 바둑계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중대사안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중국엔 부부기사도 많아

우리나라에는 아직 한쌍도 없지만 여류기사가 많은 일본이나 중국에는 꽤 여러 쌍의 부부기사가 있다. 톈안문 사태에 연루돼 중국바둑계의 실권자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망명의 길을 걸어야 했던 장 주주(江鑄久) 9단과 미국 일본 등지로 유랑생활을 하던 세계여류최강 루이 나이웨이(芮乃偉) 9단의 결혼은 ‘반상의 로미오와 줄리엣’ 으로 바둑계의 동정을 샀고(이들은 올 4월부터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약하고 있다), 97년 후지쓰배를 우승한 뒤 “먼저 간 아내에게 우승컵을 바친다”며 울음을 터뜨려 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어버린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의 부인 고(故) 고바야시 레이코(小林禮子)도 프로6단이었다. 장녀인 이즈미(小林泉美)도 부모의 길을 따라 프로에 입문(현재 3단), 여류기성을 보유하는 등 일본여류의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다.

일찍이 ‘대륙의 반달곰’으로 불린 중국바둑의 영웅 녜 웨이핑(褐衛平) 9단과 쿵 샹밍(孔祥明) 8단의 결혼은 중국당국의 의도가 작용한 정략결혼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은 아들 하나를 두고 이혼하고 말았는데, 이 아들이 지금 일본에서 신예기사로 주목받고 있는 고우 레이분(孔令文) 초단이다. 성이 공(孔)씨인 건 자기를 양육한 어머니 성(姓)을 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녀기사로서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 고수들이니만큼 이즈미나 고우 레이분이 과연 얼마나 뻗어 나갈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이창호’로 불리며 21세기에 이창호 9단을 가장 위협할 기사로 손꼽히는 창하오(常昊) 9단은 스물네살밖에 안된 나이에 자기보다 여덟살이나 연상인 장쉔(張璇) 8단(98년 보해컵 세계여류바둑선수권 우승자)과 올초 전격적인 혼인신고를 서둘러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 하는데, 나이차도 그렇거니와 장8단이 한번 결혼에 실패한 이혼녀여서 중국 ‘오빠 부대’들의 눈총을 꽤나 받았다고 한다.

프로기사끼리의 결혼생활은 남자쪽보다는 여자쪽에 더 전력상승을 가져다 주는 모양이다. 류시훈 7단과 더불어 일본바둑의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았던 양자위엔(楊嘉源) 8단과 결혼한 지넨 가오리 3단은 신혼의 약발(?)이 대단했음인지 결혼 직후 일본 여류본인방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고, 니시다 데루미(西田榮美) 5단도 고야마(小山童吾) 6단과 백년가약을 맺은 뒤 여류명인에 올랐다. 니시다 5단은 여류명인 취위식에서 결혼생활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당당히 말해 부부기사간의 시너지 효과가 상당함을 증명하고 있다.

정용진/ 월간 ‘바둑’ 편집장